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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가

스페인을 휩쓴 카탈루냐의 광풍 - 지로나 FC

1. 지로나의 지난 날을 돌아보며

에스타디 무니시팔 데 몬틸리비 , 지로나의 홈구장이다.

 
 13500명이 정원인 카탈루냐 지로나시의 작은 축구장인 몬틸리비를 사용하는 지로나 FC. 2017년 여름, 하부리그를 전전하던 그들은 구단 창단 87년만에 처음으로 1부 리그로 승격되며, 시티 풋볼 그룹과 동행을 시작하게 된다. 비록 첫 승격과 라리가의 꿈은 2시즌만에 강등됨으로 끝나게 되었지만, 2부리그에서 착실히 준비해온 그들은 21/22시즌을 6위로 마치고, 플레이오프 끝에 극적으로 라리가에 복귀하게 된다. 
 
 그들을 승격시킨 감독은 다름 아닌 승격 전도사라 불린 '미첼 산체스'이다. 라요 바예카노와 우에스카를 모두 승격시킨 전적이 있지만, 지나치게 공격적인 축구를 행했던 그는 1부리그를 견뎌내지 못해왔기에, 라리가에서 과연 지로나가 통할지 사람들은 의문을 가졌다. 심지어, 직전 시즌 리그에서도 6위로 플레이오프에 겨우겨우 진출했고, 매우 극적인 승부로 올라온 팀인지라 전력에 우려가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은 보란듯이 우려를 깨버리며 22/23시즌 10위를 기록하며 승격팀들 중 가장 좋은 성적으로 리그를 마쳤고, 2023년 겨울부터 여름까지 전력 보강을 착실히 하며 기틀을 만들어냈다. 

지로나의 간판 스트라이커, 아르템 도우비크

 
 우크라이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온 빅토르 치한코우를 싼 값에 1월에 영입한 것을 시작으로, 뒷공간이 없으면 힘을 거의 쓰지 못하던 카스테야노스의 이탈을 보다 툴이 다양한 아르템 도우비크로 대체했다. 좋은 활약을 보인 임대생 이반 마르틴과 미겔 구티에레스를 완전영입했고, 얀 코투의 임대 기간을 1년 연장했다. 
 
 산티 부에노나 오리올 로메우같은 주축 선수를 잃었지만, 데일리 블린트를 영입하고, 에릭 가르시아와 파블로 토레를 임대 영입하는 등 빈 자리를 나름 잘 채웠다. 직전 시즌 PSV에서 임대생활을 보낸 시티 풋볼 그룹 소속의 윙어 사비뉴를 임대 영입하는 등, 많은 젊은 선수 역시 임대영입 했지만, 당시엔 엄청난 기대를 걸진 않았었다. 이렇게 지로나는 한층 강해졌다 하지만 의문부호가 남은 스쿼드 구성으로 23/24 시즌에 돌입하게 된다.
 
 

2. 지로나라는 돌풍, 라리가를 휩쓸고 지나간 광풍


 주축 세 명을 잃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며, 지로나는 매우 좋은 모습을 리그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개막전 소시에다드전에서 무승부를 거둔 후,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6경기 전승행진을 이어나갔다. 초반엔 단순 플루크라 생각한 이들이 많았으나,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킨 지로나는 이후 바르셀로나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승리를 한번씩 거두며 강팀 상대로도 통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지난 시즌에도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는 등 가능성을 보였지만, 한 시즌만에 중위권에서 우승 경쟁을 하는 팀으로 입지가 바뀌어버렸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지로나의 감독 미첼 산체스

 
 우선 미첼 감독의 전술적 역량이 만개했음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오리올 로메우의 이탈 이후, 마땅한 홀딩 자원이 없는지라 지로나의 전술 수정은 불가피했다. 미첼 감독은 여기서 매우 공격적이며 유연한 접근을 한다. 기본적으로 포메이션은 경기마다 달라지며, 포백 운용, 쓰리백 운용 모두 보인다. 
 
 기본적으로 4-2-3-1 내지는 5-4-1이라 볼 수 있는 전형으로 시작한다. 홀딩 역할을 해주던 오리올 로메우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하여  보통 알레이스 가르시아와 양헬 에레라가 투볼란테로 나온다. 유사시엔 센터백과 미드필더 모두 소화 가능한 다비드 로페스가 중원에 가세하기도 한다. 또, 우측 윙백으로 출전하는 얀 코투가 윙어처럼 측면을 타고 올라가며, 치한코우나 이반 마르틴은 우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역발 플레이를 선보인다.  

지로나의 수비 시 대형. 치한코우가 중앙으로 빠져들어가고, 코투가 우측면으로 올라가며 4-2-3-1 대형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지로나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공격시 현대 축구의 트렌드에 맞게 3-2-5 대형을 선보인다. 중앙 수비수 롤을 맡을 수 있는 세 명의 볼줄기를 잘 뿌리는 선수가 뒤를 받쳐준다. 여기서 왼쪽 풀백으로 출전하는 미겔 구티에레스좌측 하프스페이스로 언더래핑을 하며, 동시에, 좌측면의 정발 윙어 사비뉴가 넓게 폭을 벌려준다. 여기서 미겔은, 중앙의 알레이스 혹은 에레라가 침투를 가져가면 바로 볼란테 자리로 내려가서 그 자리를 커버하는 등, 프리롤이라 해도 될 정도로 유연한 움직임을 보인다. 

지로나의 공격 시 대형. 미겔과 에레라는 프리롤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편이다.

 
 아마 이 전형에서의 적극적인 하프스페이스를 통한 침투가 가능한 이유는 도우비크에 있을 것이다. 종전 시즌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카스테야노스와 다르게, 도우비크는 우월한 피지컬을 활용한 연계에 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도우비크가 앞선에서 볼을 소유하는 시간동안, 미겔이나 치한코우/마르틴, 더 나아가서 양헬 에레라까지도 적재적소의 위치로 침투해 들어가며 지로나는 양질의 공격 찬스를 자주 맞는다.

지로나의 최종 공격 형태

 
 그리고, 최종적으론 3-1-6 포메이션에 가까운 형태가 된다. 측면을 넓게 활용하던 사비뉴와 코투는 상대 1~2명 정도는 가볍게 제치고 갈 수 있는 드리블 돌파력을 지녔기에 엔드라인 가깝게까지 밀고 들어간 후 컷백 혹은 크로스를 올린다. 중앙에 도우비크와 에레라의 트윈 타워가 형성되기에 웬만하면 볼을 이 둘이 따준다.

도우비크의 필드골의 3분의 1 이상이 헤더 골이며, 에레라의 공중볼 경합 성공률이 60%에 육박한다는 점이 이런 형태의 지공의 강력함을 증명한다. 설령 시퀀스가 골로 연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박스 주변에 투톱을 제외하고도 3~4명이 포진해 있기에 세컨볼 상황에서도 수적 우위를 갖게 되며, 공격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지로나의 매지션이자 마에스트로, 알레이스 가르시아

 
 도우비크와 더불어, 알레이스 가르시아가 존재하기에 이러한 형태의 공격이 가능하다. 74%에 육박하는 롱 볼 성공률을 가졌을 정도로 정확한 킥력을 갖고 있으며, 후방에서 영리한 플레이로 양질의 찬스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주고, 왕성한 활동량으로 수비도 열심히 해주는  알레이스가 존재하기에 지로나는 로메우의 빈자리로 생긴 수비의 취약함을 더욱 강력한 공격력으로 커버할 수 있었다.

3-1-6 형태의 공격 이후 압박 기조

 
 그러나, 전문 홀딩 미드필더가 없는 상태에서 과하게 공격적인 포진을 활용하기에 역습 상황에서 취약점을 갖고 있다. 심지어, 에릭 가르시아와 데일리 블린트같은 센터백들은 수비력과 관련해 약점이 있는 선수들인지라 역습에 당할 확률이 높은 편이다.

이러한 리스크를, 라인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려서 볼을 뺏기면 역 압박을 들어가는 식으로 상대의 역습을 끊어낸다.지로나는 지역 수비 바탕의 수비를 주로 펼치기에 이는 더 효과적이다. 지역 단위로 선수들이 볼을 뺏기면 바로 압박 움직임을 가져가기에 플랫형 4-4-2를 주로 사용하는 리그 내 약팀들이나, 지공 상황 위주로 좋은 모습을 보이는 리그 내 중상위권 팀들 상대로 잘 통했다. 이런 식으로 미첼의 약점을 가리고 강점을 두드러지게 하는 전략은 빛을 봤다.
 
 또한, 로테이션 자원들이 조커 역할을 확실히 해주는 점 또한 올시즌 지로나의 강점이다. 베테랑 스트라이커 크리스티안 스투아니는 영향력은 떨어지지만, 리그에서 737분동안 8골을 기록하며 골 스코어러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줬고, 크리스티안 포르투도 선발과 교체를 오가며 5골과 4개 도움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다. 이처럼, 어떤 선수를 기용하더라도 시스템에 잘 녹아든다는 것 역시 지로나를 강하게 만들어준다.
 
 다만, 레알 마드리드에게 올시즌 특히나 취약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는 지로나의 취약한 부분을 잘 보여준다. 강한 압박을 바탕으로 한 지역 방어를 보여주는 지로나에겐 애석하게도,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은 매우 좋은 탈압박 / 돌파 능력을 갖고있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얀 코투와 에릭 가르시아쪽 라인에서 비니시우스에 대한 대인 수비 전술이 전혀 통하지 않다보니 지로나의 수비 대형은 4골을 내주며 무너지고 말았다. 바로 다음 경기인 아틀레틱 클럽과의 경기에서도 측면 - 중앙 수비가 무너지며 3:2로 패배하는 등 어느정도 파훼당한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비니시우스를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코투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있다. 지로나의 공격력 관련 모든 지표는 리그 최상단을 달리지만, 수비력 관련 지표는 모두 중위권 수준에 가깝다. 원정에선 홈에서만큼 강력한 화력이 잘 나오지 않기도 하는 등, 2024년 2월 이후로 기세가 살짝 꺾이며 우승 경쟁에선 다소 멀어지며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현재는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정지으며 바르셀로나와 2,3위 경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후반기의 떨어진 페이스가 조금은 아쉬울 수 있지만, 지로나라는 팀의 규모와 지난 시즌 성적, 그리고 당초의 기대치를 생각하면 지로나가 일으킨 돌풍은 충분히 가치있었던 매우 좋은 성적이라 해야만 한다.
 

3. 지로나가 일으킨 바람은, 돌풍을 넘어서 일상이 될 수 있을까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자축하는 지로나 선수단

 
 올시즌 지로나가 보여준 모습은 라리가 중하위권 팀들에겐 한줄기 희망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시티 풋볼 그룹 산하에서 좋은 선수를 수급받고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장점을 업고 있지만, 3강 체제와 그 바로 밑의 중상위권 체제가 견고한 라리가에서도 순위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는 것에 성공했다.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성공한 지로나에게 이제 우선적으로 주어진 과제는 선수단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다.

맨체스터 시티로의 이적이 확정적인 사비뉴(사비우 모레이라)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팀 전술에서 매우 중요한 축을 차지했던 사비뉴가 같은 시티 풋볼 그룹 산하의 맨체스터 시티로의 이적이 확정적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에릭 가르시아나 얀 코투같은 키 플레이어들과 파블로 토레같은 로테이션 자원도 원 소속팀으로 임대 복귀하게 된다.

미겔 구티에레스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바이백 조항이 있으며, 유럽 주요 빅클럽들과 이적설이 꾸준히 나고 있다. 알레이스 가르시아도 빅클럽으로의 이적설이 잊을만하면 나오며, 스트라이커 기근이 심한 요즘 축구계에, 도우비크같은 좋은 스트라이커가 언제 이적해갈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이처럼, 지로나는 스쿼드가 분해될 위기에 직면해 있다.
 
 챔피언스리그 진출로 인해 수익도 생겼을테니, 지로나는 이제 기존 자원들을 대체할 좋은 자원들을 구하거나,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켜야만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현 소속 선수들이 지로나에 대한 애정이 커 보이며, 기틀을 꽉 잡아주는 미첼 산체스라는 좋은 감독을 보유했다는 점이다.

가브리 마르티네스같이 2부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 임대로 떠나간 유망주들도 다수 있고, 포르투, 스투아니같은 로테이션 자원들도 일정 기량을 갖추고 있다. 기존 선수들을 토대로 뎁스를 넓혀줄 선수들을 현명하게 영입한다면, 확실한 틀 안에서 좋은 축구를 장기간 선보인 미첼의 지로나인 만큼 다음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이다.